-
1.태백시 高原축제
축제는 왜 벌이는가. 보다 좋은 생산을 예비하는 정신과 근육의 풀음인가. 문화의 달 10월-.보다 나은 삶의 질에 눈뜬 전국의 주민들이 본격 지방자치에 맞춰 곳곳에서 문화축제를 만
-
PK·TK ‘낙동강 전선’ … 남강댐 물로 다투는 PK
한나라당의 주된 기반인 부산·경남(PK)과 대구·경북(TK) 지역에서 ‘물 전쟁’이 벌어지고 있다. 부산과 대구가 취수원 이전을 추진하면서 인근 경남, 경북과 대립하는 구도다.
-
"한강 아닌 낙동강서 용 나온다"
노무현 대통령이 '동업자'라고까지 말한 측근 안희정(사진)씨가 7일 입을 열었다. 내년 대선과 관련, "4년마다 (대선) 판을 갈아엎고 뽑는 것은 당원과 대중적 흐름"이라고 말했
-
[전쟁사 돋보기] 국군 6사단
6·25전쟁 전인 1949년 충북 청주에서 원주로 이동해 중부지역 요충인 춘천 정면을 담당했던 사단이다. 방어를 맡은 지역의 전면은 모두 84㎞에 이르렀다. 원주에 사단 사령부를
-
[김영희 칼럼] 아프간 파병의 부가가치
아시아 대륙 문명의 십자로, 실크로드의 교차로. 옛사람들은 거기서 서쪽으로 나가 이란을 거쳐 서양문명의 발상지 그리스에 닿았다. 남으로 가면 인도, 동으로 가면 중국이요, 북으로
-
[6·25 전쟁 60년]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⑬ 12월 맥아더의 철수 결정
백선엽 사단장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이 1950년 12월 5일 평양 동부 지역을 지나 남으로 후퇴하고 있다. 중공군 2차 공세에 밀린 국군 1사단은 사리원을 거쳐 임진강까지 퇴각했다
-
[6·25 전쟁 60년] “운산 수수밭서 격투 끝에 첫 중공군 포로 붙잡아”
1950년 10월 24일 평북 운산에서 중공군 포로 1호를 붙잡은 김대일씨. [신인섭 기자]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회고록 ‘내가 겪은 6·25와 대한민국’이 연재되면서 전쟁에 직간
-
[6·25 전쟁 60년] 낙동강 혈전 (53) 처참한 살육의 현장
적은 쉴 틈 없이 공격해 왔다. 북한군은 애초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국군과 미군의 강력한 방어막에 막혀 달성이 불가능
-
[6·25 전쟁 60년] 지리산의 숨은 적들 (177) 작전 중의 중장 승진
1952년 6월 육군 2군단장 시절의 백선엽 장군. 백 장군은 ‘백 야전전투사령부’의 사령관을 맡아 51년 말부터 빨치산 토벌 작전을 펼치던 중 52년 1월 중장으로 진급했다. 4
-
[6·25 전쟁 60년] 서울 거쳐 평양으로 (85) 청천강의 차가운 강바람
1950년 10월 20일 평양 북방 숙천과 순천에 나타난 C-119 수송기에서 미군 공수부대원들이 낙하하고 있다. 김포에서 이륙해 평양 북방까지 날아온 미군의 C-119와 C-47
-
[6·25 전쟁 60년] 낙동강 혈전 (63) 다부동의 마지막 위기를 넘다
전쟁 중의 망중한(忙中閑). 6·25전쟁에서 함께 작전을 수행해 북한군의 공세를 막았던 한국군과 유엔군 장병의 팔씨름판이 벌어졌다. 안간힘을 쓰고 있는 국군과 유엔군의 두 팔씨름
-
가미카제→인민군→국군 … 자유의 길은 너무나 멀었다
"중앙선데이,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" 예비역 공군 소장 윤응렬의 25살 때 모습. 1952년 출격을 마치고 경남 사천기지로 귀환한 뒤 헬멧을 벗고 포즈를 취했다. 윤응렬이 19
-
[6·25 전쟁 60년] 낙동강 혈전 (65) 달라진 적의 공세
6·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의 첫 삽을 뜬 지 올해 4월 3일로 10년이 됐다. 그럼에도 이땅 곳곳에서는 전몰자 유해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어 전쟁의 격렬함과 고통을 고스란히 알려
-
[6·25 전쟁 60년]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⑮ 밀리고 밀리는 전선
국군과 미군, 연합군을 한강 이남까지 밀어낸 중공군의 3차 공세는 1950년 12월 하순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. 사진은 임진강 부근까지 내려온 중공군 포병들이 12월 31일 국
-
[6·25 전쟁 60년] 임진강을 넘어온 적 (37) 평양서 발견한 전쟁 준비 문서
미군과 연합군의 지원군 본대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 미군은 공중 공격으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일단 힘을 기울였다. 1950년 7월 3일부터 이틀간 북한군을 맹렬히 공격했던
-
한국전 흐름 바꾼 ‘우직지계’의 승리, 인천상륙작전
인천상륙작전을 주도한 맥아더 장군은 정면 공격 위주의 패러다임을 간접접근 전략으로 바꿔 세계 전쟁사에 남는 승리를 거뒀다. [중앙포토] “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는데 앞으로 전쟁이
-
[정진홍의소프트파워] '오늘의 인천 상륙작전'을 감행하라 !
56년 전 오늘(16일) 낙동강 전선에서는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이 개시되었다. 그것은 바로 전날인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고 그것을
-
(3650) - 제79회 육사졸업생들(103)| 장창국| 정규7기와 「6·25」
7기 정규는 제주도반란사건, 여순 반란사건 때 토벌작전에 일선 소대장으로 참가한 것을 시발로 6·25발발 때는 전부가 중대장 또는 연대참모로 참전, 휴전당시는 대대장 또는 사단참모
-
[울다 웃다 80年] 27. 재회
▶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서울 시가지. 1950년 9월 중순이었다. 유엔군사령부는 제2군단사령부에 진격 명령을 내렸다. 후퇴만 거듭하던 국군이 첫 반격을 시도했다. 인천
-
(26) 창원군
우리나라 서남연안을 휩쓸고 있는 굴 양식 「붐」이 창원에서 제자리를 찾았다. 굴하면 창원의 대명사처럼 된 것도 이 때문. 길고 아늑한 남해의 자연만을 따라 40여개의 어촌계가 작년
-
(260)|거창사건(1)|「건벽청야」작전(1)|6·25 21주 3천의 증인회견·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
1951년1월의 한국전세는 전후방을 막론하고 누가 보더라도 우리편에 몹시 불리했다. 전선을 보면 서울을 무혈 점령코 한강을 도하한 중공대군은 계속 남하하여 오산·제천·영월·삼척 선
-
(237)-유엔군의 총퇴각(10)「워커」장군의 전사
1950년 12월 하순, 한국사태는 워싱턴과 유엔의 정치무대에서나 또는 현지전선에서나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. 중서부전선에서 미8군과 한국군 2군단을 강타한 35만의 중공군 및
-
(837)|내가 아는 박헌영(156)|박갑동
김일성은 이 사건을 뒤에 박헌영에게까지 둘러 씌웠다. 북한의 재판기록에는 제1권 154∼155「페이지」이승엽이 이렇게 자백하였다고 쓰고 있다.『나는 1950년 7월 하순께 안영달
-
(82)|6.25 20주...3천여의 증인회견·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3년|국군의 전선정비(6)
북괴군 최고사령부는 아군의 영동·함창·안동지역의 제2방어선을 격파하여 낙동강 이북과 이서 지구의 넓은 지역을 점령한 다음 급속도로 낙동강을 도하하여 8월15일까지는 남한 전역을 손